본문 바로가기
천문학

한국의 천문학의 역사와 발전 : 고대에서부터 근대로

by 공부하는 L 2024. 1. 30.

한국의 천문학

 

 

한국의 천문학의 역사와 발전 : 고대에서부터 근대로

 

한국 천문학의 대표 학자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지전설을 주장한 학자는 김석문이다. 그는 1697년에 자신이 편찬한 <역학이십사도총해>를 통해 지구, 달, 태양,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의 상대적인 크기를 제시하고, 지구가 하루에 한 바퀴 자전하면서 일 년에 총 366번의 회전을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태양 주위를 행성들이 공전하고 있으며, 이것은 다시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태양 주위를 행성들이 공전하고 있으며, 이것은 다시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한다고 설명했는데 이것은 티코의 행성계에서 볼 수 있는 구조입니다. 

김석문은 처음에는 중국 성리학을 기초로 천문 현상을 이해하려 했는데 그러나 청나라에서 활동했던 이탈리아 예수회 선교사 자크 로의 <오위역지>를 접하면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 책은 프톨레마이오스와 티코의 이론들을 수록하고 있었는데 김석문은 티코의 행성계를 더욱 신뢰했습니다. 그러나 티코가 지구의 자전을 거부했다는 점에는 찬동하지 을 하지 않고, 낮과 밤은 분명히 지구가 자전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했습니다. 하지만 김석문의 이런 주장은 자신이 천체들을 직접 관측한 결과들로부터 나온 것이 아닐, 단지 서양 천문학 이론들을 분석해서 나온 결과일 뿐이었습니다. 

그 후 박지원의 <열하일기>중 <곡정필담>에서 지전설과 관련된 내용이 다시 등장합니다. 박지원이 청나라를 방문했을 때, 그가 중국의 왕민호와 필담을 나누는 과정에서 홍대용의 지전설을 언급하게 되는데, 이 필담 중에 홍대용의 지전설과 서양의 지전설을 비교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당시 박지원은 홍대용이 지전설을 독창적으로 창안했다는 의미로 설명하면서, 서양 사람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전한다는 사실은 알지 못한 것 같은데, 자신의 벗인 홍대용은 이미 예전에 지구의 자전을 제안한 적이 있다고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1766년 홍대용은 북경에서 서양 선교사들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를 두고 일본의 중국과학사학자 야부치 기요시는 홍대용이 그 당시 서양 선교사들로부터 지전설에 대한 정보를 이미 들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논문을 통해 발표한 바가 있습니다. 홍대용의 문집에는 당시 서양 선교사들과 나눈 대화들이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서양 선교사들이 지전설을 언급하긴 했으나 옳은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게다가 정황상으로 교황청의 입장을 대변하던 그것도 갈릴레이를 가장 선봉에서 공격했었던 예수회 소속 선교사들이 당시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던 태양중심설의 기본 원칙인 지전설이 옳은 가설이라고 당당히 홍대용의 견해에 힘을 실어 주었을 가능성은 희박해 보입니다. 

홍대용은 대화체 문답식으로 기술한 <의산문답>을 통해 낮과 밤은 땅이 회전하면서 생긴다는 지전설과 해와 달 속에도 생명체가 살고 있을 것이라는 우주인설, 그리고 무한우주론을 제안했으며 이에 더해 가볍고 빠른 천체는 자전과 공전을 함께 할 수 있는 반면, 지구는 무겁고 느린 것이라는 자전은 가능하지만 공전은 불가능하다고 피력했습니다. 

홍대용이 서양 과학의 중요성을 크게 깨닫고 그것을 수용하고 발전시키려 했던 최초의 조선인이라고 할지라도, 지전설을 처음 제안하고 그 내용을 정리해 기록으로 남긴 학자는 김석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홍대용의 <의산문답>에서 설명하고 있는 천체들의 운동 방식 역시 티코의 행성계와 동일한데, 이것은 김석문의 <역학이십사도총해>에서 소개되는 내용과 크게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홍대용은 <오위역지>의 내용에 찬성하면서도 지전설만큼은 옳은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홍대용은 <의산문답>에서 지구가 하루에 한 바퀴를 도는 것이 무수히 많은 천체들을 포함하고 있는 무한한 우주가 지구 둘레를 한 바퀴 도는 것보다 더욱 이치에 합당하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런 문구는 우연하게도 코페르니쿠스의<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의 1권에서 소개되는 내용과 거의 흡사합니다. 결론적으로 홍대용이 설명하고 있는 지전설의 일부 요소 및 행성들의 위치와 공전에 관한 내용들은 자신이 중국에 들렀을 때, 서양 천문학을 접하면서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은 결과라고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17~19세기 조선의 학자들은 중국이나 일본처럼 서양인드로가의 긴밀한 접촉을 통해 선진 과학을 수용하고 분석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하였습니다. 

 

한국 천문학의 역사

한국의 천문학 역사는 약 2천 년 이상에 걸쳐 다양하게 전개되었습니다. 한국의 천문학은 고대 동아시아 전통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는 이웃 문화와의 상호작용, 특히 중국과의 관련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지금부터는 한국의 천문학의 역사와 발전에 대한 개괄을 살펴보겠습니다.

 

고대 시기

초기 관측: 고대 한국인들은 다른 초기 문명과 마찬가지로 시간 측정, 농업, 항해와 같은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하늘을 관측했습니다. 고고학적 증거는 선사 시대에 천문 관측이 이루어졌음을 시사합니다.

 

중국 천문학 수용

한국의 천문학 공부는 삼국시대 (기원전 57년 - 기원후 668년)에 중국의 천문학적 지식을 수용함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중국 천문학은 천체 관측과 수학적 계산에 중점을 둔 것으로 한국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고려시대 (918–1392)

관측 기술 발전: 고려시대에는 한국의 천문학자들이 관측 기술과 기기를 발전시켰습니다. 황금의 원반과 물시계와 같은 다양한 장치들이 시간 측정 및 천체의 움직임 추적에 사용되었습니다.

 

달력 개발: 고려시대에는 한국 달력의 개발이 있었으며, 중국과 고유한 천문학적 지식을 통합했습니다. 달력은 농업 및 행정 목적에 중요하며, 한국의 천문학자들은 이러한 시스템을 개선하고 유지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조선시대 (1392–1897)

왕릉천문관 설립: 조선시대는 한국 천문학의 중요한 발전 시기였습니다. 세종대왕(1418–1450)은 1432년에 천문학 연구 기관인 왕릉천문관을 설립했습니다. 이 기관은 천문학, 점성술 연구 및 달력 개발을 담당했습니다.

 

천상열차분야지도 (한국의 천문도): 1483년에는 세조대왕이 천상열차분야지도를 창조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이것은 포괄적인 별 지도 및 천체 지도로, 그 시기의 최첨단 천문학 지식을 반영한 훌륭한 업적 중 하나입니다.

 

이정부의 기여: 16세기에 활동한  이 정부는 한국 천문학에 중요한 기여를 했습니다. 그는 혼천의와 천문 및 기상 백과사전을 개발하고 천문기기를 개선했습니다.

 

조선 후기

서양 영향: 조선 후기에는 서양의 천문학 지식이 한국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마태오 리치(Matthew Ricci)와 같은 예수회 수사들은 유럽 천문학 및 천체 지구를 소개했습니다.

 

근대

서양화와 현대 천문학: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는 한국의 현대화가 이루어지며, 이에 따라 과학 연구 기관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서양식 관측대가 설립되었고, 한국 천문학자들은 현대적인 과학적 방법을 도입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 전쟁 이후

한국 전쟁 후 (1950–1953), 대한민국은 과학 연구 및 교육에 투자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천문우주과학연구원(KASI)은 1974년에 설립되어 우주과학 및 천문학 분야에서의 연구와 국제적인 협력에 기여했습니다.

 

우주 탐사: 현대 몇 십 년 동안 대한민국은 우주 탐사 분야에서 진전을 이루었습니다. 한국천문우주과학연구원은 위성 발사, 우주 연구 및 국제 협력에 참여하여 국가적으로 공헌하고 있습니다.